<이수경 개인전 : F/W 16>


혐오라는 신상품

윤민화

이수경이 제안하는 《F/W 16》 시즌 컨셉은 ‘혐오스러운 서울의 풍경에서 편집해낸 이미지들의 직관적인 꿰매기로 탄생한 시각적 혼합물’이다. 여기에서 ‘혐오’는 특정 대상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적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수경의 작업적 동력이 되는 개념이다. ‘혐오’는 아주 일상적인 풍경에서 촉발된다. 대표적인 예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남성-노인들이 있다. 누구나 길거리를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남성-노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노인들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은 가사 일을 하느라 주로 집에 머무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수경은 이들의 표면적인 모습에서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문제적 맥락들을 읽어낸다. 이를테면, 어떤 남성-노인은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선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정치적으로 극우화되어 보수정권에 표를 던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때로 그들은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임산부 좌석에 기어코 X자를 그려 넣고야 마는 행태로 논란이 되기도 하고, 지하철 택배나 주유소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발견되기도 하며, 동시에 어떤 남성-노인은 지팡이로 젊은 여성의 복장 상태를 단속하고야 마는 것이다.

남성-노인이라는 단일한 유형의 인물군에서 이렇게 다중적이며 분열적인 이미지들이 겹쳐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구조적, 제도적인 문제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수경은 단순히 그들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의 차원으로 밀어두지 않는다. 그녀 또한 문제적 도시 서울에 함께 거주하고 있는 일원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또한 제도적 차원의 문제들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노인이 대변하는 서울의 풍경을 이수경은 결코 타자화하여 바라볼 수 만은 없다. 그저 풍경 안에서 그들과 함께 서성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수경의 작업적 맥락에서 ‘혐오’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조리를 느끼는 지점에서 거세게 항의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는 상태, 풍경을 긍정이나 부정 둘 중의 하나로 판단 내릴 수도 없는 유보 상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무기력한 상태에 머무르면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스스로에 대한 감정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남성-노인들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결국 사회와 구조적으로 유리되어 탈락한 자들, 도시 내에 거주하지만, 이방인과도 같은 사람들, 자의로든 타의로든 서울이라는 도시가 제공하는 제도에 무사히 안착하지 못한 채 겉도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통제하는 제도로서의 법이나 규율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안다. 시스템에서 미끄러지고 벗어난 삶을 사는 모든 이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법(제도)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그 어느 도시에도 없었다. 그런 문제점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가운데, 서울에 살면서 느끼게 되는 이런 다중적 감정은 “사회가 너무 빠르게 발전하면서 생겨난 시공간의 틈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남성-노인들은 “한강의 기적 세대와 인터넷 세대 모두 너무 빠르게 지나면서 그 둘 사이에 낀 사람들”로 명명될 수 있다.

결국 ‘혐오’는 이수경 자신 (혹은 작가가 속한 세대라는 시공간)과 남성-노인들 앞에 놓여 있는 다각적인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에서 발생한다. 이 거리감 앞에서 그 어떤 해답도 나오지 않을 때, 주체와 대상 양쪽 사이에서 번지는 감정이 바로 혐오이다. 따라서 혐오감을 해결하려는 것은 예술가로서 이수경의 목표가 아니고, 그러한 혐오가 생겨나고 현상 유지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에서 작업의 동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혐오’가 이번 전시의 기저에서 동력으로서 작동되었다면, 그 혐오스러운 풍경을 기억하고 이미지로서 수집하는 과정에는 일명 ‘LA갈비의 도축법’으로 설명되는 재단법이 소환된다. LA갈비는 유통과 조리에 쉽도록 절단기를 이용하여 뼈의 방향과 직각으로 자르기 때문에 갈비뼈의 측면이 동그란 패턴이 되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다른 갈비에 비해 두께가 얇고 갈비뼈의 단면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갈비를 도축하듯이, 이수경은 현실 풍경의 남성-노인의 이미지들을 특정한 각도로 재단한다. 다시 말해, 현실 풍경의 맥락, 주제, 네러티브 등이 향하는 것과 관계없이 작가의 시선이 머물렀던 남성-노인의 차림새와 늙은 몸의 자세 따위가 풍경의 표면으로서 크롭되고 기억 속에 캡쳐되는 것이다.

이수경은 ‘LA갈비의 도축법’의 다음과 같은 지점이 유독 자신을 건드린다고 말한다; “1)잘린 단면의 기괴함, 2)그래도 만져보고 싶은 이상한 느낌, 3)갈비를 좀 더 빠르고 싸게 공급하는 한국적인 방식이라는 점에서 느껴지는 한국적 속도감”. 이런 지점들은 조각 작품들을 제작할 때 일종의 리트머스처럼 작용되어 전시 전반의 컨셉을 잡아주는 지표로서 쓰였다고 한다. 또한 작가는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뼈를 잡고 갈비를 맛있게 먹는 자기 자신까지도 이러한 감정에 포함되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런 지점은 서울이라는 풍경을 혐오스러워하면서도 그 혐오 안에 거주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게 되는 작가로서의 위치에 대한 메타포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는 평소 패션을 통해 믹스앤매치의 방식을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왔다. 과거 유행의 표면만을 신상의 일부로서 취하고 소비하는 방식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작가의 개인적 성향이 ‘LA갈비 도축법’과 같은 이미지 수집 툴을 내면화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애초에 남성-노인들의 차림새에서 재미있는 지점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이수경은 “그들은 멀리서 보면 무성의하게 아무것이나 걸친 듯 보이는데, 유심히 관찰해보면 옷의 소재, 패턴의 조합과 늙은 몸의 자세가 퍽 흥미롭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결국, 혐오로 점철되는 서울이라는 풍경 (특히 남성-노인의 차림새)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LA갈비식 도축법’을 거쳐 크롭되고 캡처되는데, 이 과정에서 ‘혐오’는 슬그머니 조금은 ‘즐길만한 것’으로 걸러져서 이미지 데이터로 기억 속에 수집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단지 데이터 차원에 머물렀던 남성- 노인들의 풍경을 볼륨을 갖는 덩어리로 제작한다. 남성-노인의 차림새를 연상시키는 소재들이 한껏 전시장에 펼쳐져 있지만, 이미 이수경의 머릿속에서 재단되고 걸러진 이미지들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애초에 혐오감을 주던 남성-노인의 차림새 그대로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각들은 남성-노인들의 의복 소재들을 쭉 늘어놓고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직관적으로 형태를 잡아가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믹스앤매치의 문법을 적용하여 서로 다른 소재들을 갖다 붙이거나, 한 소재의 모양새를 이질적인 방향으로 고정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해왔다. 패브릭의 소재와 장식된 소품들은 그저 고정하고 형태를 잡는 목적에서 실로 꿰매어졌을 뿐이며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는 패브릭을 접착제로 붙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의복이라는 소재와 그것을 믹스앤매치해 나가는 방식에만 흥미를 느꼈을 뿐, 실제로 정교한 수작업을 통해 실용적인 무엇을 제작할 의도는 없었음을 보여준다.

“저는 이곳에 서 있고, 제가 바라는 세계가 있고, 제가 속한 세계가 있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을 냉정히 보면서, 그걸로 무언가 패션 ‘신상’ 처럼 느껴지는 조각을 만들었어요. 이 혐오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노인들이 가지고 있거나 만들어낸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갱신해야 하는 덩어리로 결국은 우리(나)의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그 형태와 양상이 달라지겠지만요.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거리감을 가지면서도 제 자신이 크게 비윤리적, 비도덕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것을 아직은 거리를 두고 관찰할 시간이 있어요. 이때에 뭔가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한국과 서울이 늘 그러듯이, 재빠른 변화를 이뤄내려 하는) 노력보다는, 일단 그 자체를 조각의 언어로 드러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이수경과의 대화 중

이수경은 “우리 사회가 가진 속도감 속에서 혐오라는 덩어리가 신상품처럼 갱신되는 가까운 미래를, 혹은 그 미래가 이미 도달한 현재를 본다”고 말한다. 결국 《F/W 16》에서 선보이는 시즌 신상품들은 “가까운 미래에 유행할 패션이나 분위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현재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오래된 신상품”인 것이다. 이런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이미지 소비 방식은 드로잉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드로잉에는 제작된 작품들을 이미 소지하고 있는 모델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오래된 신상품을 이미 소지하고 있는 가상의 이미지까지도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경이 만든 덩어리들은 그녀가 서 있는 여기와 그녀가 원하는 저기 사이의 거리감 가운데에서 발생한 혐오를 동력 삼아 패션 ‘신상’처럼 느껴지도록 제작된 조각들이다. 그녀가 느끼는 ‘혐오’는 쉽게 해체되지 않을 덩어리로 남아 다음 세대로 넘겨질 것이다. 일단은 그것을 문제 삼거나 해결해보자는 취지가 아니라, 그저 혐오 그 자체를 조각의 언어로 드러내는 것으로 우리 모두의 눈앞에 제안하는 것이다. 이제 이 ‘혐오라는 신상품’은 어떻게 소비될까. 관객이 꺼내 든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찍혀 데이터로 저장될 가까운 미래의 이미지로서, 그것이 태연히 흐르게 될 타임라인에서, 오래된 신상품으로 제안된 오늘날의 혐오는 어떤 이미지로 소비될 것인지 궁금하다.

*큰 따옴표 : 작가의 말 직접 인용



Review (July, 2016, 미술세계)


혐오의 풍경에서 두 걸음 물러서기


유지원

http://www.mise1984.com/magazine?issue=380&article=1059